본문 바로가기
여행

남양주 봉선사 독성도 - 남양주 운악산 봉헌사 천년 탐방

by travel-adventures 2025. 5. 14.
반응형

남양주 봉선사 독성도

 

 

세조의 추도와 모종의 보호를 위해 중창된 천년 고찰 봉선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다. 969년(광종 20)에 법인 국사(탄인)가 창건하여 운악사로 했다. 그 후 조선세종 때 이전 7종을 선교양종에 통합할 때 이 절을 혁파했지만 1469년(례종1)에 세조의 비 정석왕후윤씨가 세조를 추모하고 강침을 보호하기 위해 89매스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로 했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며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을 같은 해 주조했다고 한다. 1550년(명종 5)에 이 절은 선교양종 가운데 종교의 목사찰로 지정되어 전국의 스님과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전소되어 이듬해인 1593년 주지낭이 중창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 호랑이로서 다시 소실한 것을 1637년에 주지계민이 중창하고, 1749년(영조 25)에는 재초가 중수했다.

 

운악산 봉젠지 1주문

 

봉선사가 현존하는 당우에는 대법당, 삼성각, 개건당, 방적당, 운하당, 범종각, 청풍루,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글 현판을 진행한 것이다. 법당 사방의 벽에는 한글 호화경과 한문 호화경을 동판으로 새겨서 이상하다. 문화재로서는 보물 제397호로 지정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비롯해 1903년에 그려진 칠성탄화, 사원 입구 보운당 부도 등이 있다.

 

운악산 봉선사의 표식석으로 하단 대석에는 꿈 같은 용무늬가 인상적이다.

 

봉젠지 일주문 현판의 문자는 운야(虘虛, ) 스님의 유고로 이자코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1주문 뒤의 하시소본찰 봉선사 1551년 봉선사는 교종본찰로 선정되었다. 특히 한 주문 뒤에 교종본찰봉선사로 여겨지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선사 조감도 1926년에는 주지의 월초가 대웅전과 비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법당 등 14동 150관 건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1959년에 화주가 범종각을 세운데 이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운경과 능가가 운하당을 세우고, 1970년에는 주지 운하가 대법정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구름이 영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선사 무도탑군 오른쪽에는 운하 대종사(虘虛大宗師) 탑탑비도 있다.

 

청법가 작사가이기도 한 하루하라 이광수 기념비. 봉선사의 입구에 있다. 봉선사 입구에는 하루하라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감성적인 천재 하루하라 이광수 인물로서 1922년의 이시노지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호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해 <이차동의 죽음 1935년>, <꿈 1938>, <무명 1939>, <사랑 1939>, <원효 대사 1942> 등 많은 불교 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 그러자 하루하라는 하치무라인 봉젠지 운하의 승려에 의지해 머물며, 요전날의 친일 협력에 대한 자민의 돌베개를 끊었다. 하루하라는 <이시베쿠>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 수도 생활을 할 생각으로 꽤 크고 장엄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에 갔다"고 말했다. 하루하라의 시 연인로쿠하라 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다. “당신에게 아낌없이 아무것도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봐. 배웠어… 지금 알게 된 노라님은, 이 몸에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지는 연인의 몸을 바친 부처님이라고」 표현해 보살도를 줬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노래하는 청법가의 작사도 하루하라가 했다. 불행히도 북쪽으로 당겨진 후 1950년에 삶을 마쳤다. 깊게 가는 가을, 세조대왕, 하루하라 이광수와 함께 봉선사를 걸어 봄 직도한다. (불교신문 3741호/자)

 

여기서 조선명종대에 승과시험 과거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쓴 카츠카헤이의 표지다. 당시 니시야마 대사, 사명대사 등 많은 고승이 여기에서 실시된 승과에 참여했다고 한다.

 

봉선사 사면불/석불조각가 오채현 석가모화, 비와자나블,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108분 합창화 무게 18톤의 자연암석에 사방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봉선사 사면불

 

해피타이거/석불조각가 오채현 돌로 만든 호랑이 이상의 타이틀이 해피타이거다. 엄마 등 위에 올라간 아이 호랑이는 좋아해서 입을 닫지 않는다. 오채현 조각가의 작품이다. 과천호광사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 작가는 일생을 돌 조각에 매진해왔다. 경북대학 미술학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한 그는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의 조수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봉선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삼성각. 동종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태워 한국전쟁 이후 운하(虘虛, ), 운경(운경, ) 등이 절을 재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봉젠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현판(현판:벽이나 문 등에 붙이는 용도에 사용된다)과 주련(주련:기둥이나 기둥이나 벽에 사용한다) 세로가 된 불평의 대부분이 한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唐竿支柱 당시 버팀대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원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헛소리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했다. 봉선사 당시의 지주는 서기 1469년, 당사의 초창시에 지어진 것으로, 명종 6년의 승과 고시 부활과 함께 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으로 시험을 실시했을 때, 승과기를 높게 붙여 놓았다고 한다. 1장의 대석을 깎아내어 양기둥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제작 기법이 뛰어나 드문 형태다. 기둥 높이 148cm, 기둥 폭 34cm, 기둥 사이 40cm, 전폭 108cm, 두께 100cm로 장대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봉젠지 가야키 유래/수령 500년, 수주 5m, 수고 21m 500여년 전 세조의 비정희왕후는 먼저 가신 선왕의 위업을 기리며 아야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절의 이름도 운악사에서 봉선사로 다시 불렀다. 이때, 사원의 입구는, 올바른 장소에 느티나무를 정중하게 심었습니다. 이전부터 느티나무가 없는 사원이 없을 정도로 느티나무는 사원의 일부와 같은 존재였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절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절을 위해 느티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 후, 이 느티나무는 대지를 향해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두 팔을 펼쳐 하늘을 지탱하도록 우울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임진왜란과 전쟁의 전란을 경험하면서도 부상을 입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느티나무는 오래 살다 나무다. 생노병사의 자연 현상 앞에서 초연한 이 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나라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기도하거나 무념무상의 경지를 깨닫기도 한다. 지금은 500년의 풍속에 옛 기색은 찾을 수 없습니다만, 매년 봄이면 끓여 새싹을 내고 자연의 회에서 벗어나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의 현대인을 이끄는 스승이 되어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수목 안내판에서)

 

왼쪽에 대소인원 이누하마 표지석과 오른쪽에는 오채현 작가의 석가모니블이 조성돼 있다. 봉선사 시모마비는 1469년 조선 7대 세조대왕의 위패를 미무라카쿠, 현 지장전에 모시고, 중창불사를 하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시모마비에는 「대소인원 이누하마」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사람과 원래는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람은 관직이 없는 사람이고, 원은 관직이 있다.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신분의 지위 높아짐을 불문하고 모두가 타고 있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린다는 의미다.

 

사원 입구에 있는 보물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이 걸려 있는 종각루다.

 

봉성사 범정루 (梵鐘樓) 봉선사의 동종은 대법당 앞마당에 종각이 있었다. 이후 지금의 대의왕전 약사 여래좌불이 종각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2000년 이전에 지금의 범종루를 세워 동종을 다시 옮겼다.

 

풍찬사 종루

 

봉선사 구리 종(호선지 구리 종)/보물 제397호 봉선사 동종은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전기 대형 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예종 원년(1469)년에 제작되었다. 1469년 정희 왕덕윤씨가 봉선사를 크게 중창할 때 세조의 명복을 빌리기 위해 조성한 봉선사 동종이다. 높이 23cm, 구경 15cm. 전체적으로는 종체의 폭이 좁고, 꼭대기에 음통이 없고 쌍용의 종뉴만 있다 조선시대 범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종뉴는 입을 꽉 찔린 채 양두를 서로 반대로 비틀고 있는 쌍용으로 장식했다. 앞발로 여의녀를 괴롭히고 있지만, 구부러진 몸의 꼭대기에서도 여의사를 잡고 있어 구부려 머리 위에 힘차게 솟아나온 뿔이 웅장한 맛을 준다.

 

한글 현판이 있는 범정루를 보면 동종이 상하 2개가 보이지만 어느 동종이 보물 제397호의 것인지 설명이 없다.

 

봉선사대의왕전(大醫王殿) 종종루 뒤에 있는 약사불이며 원래 동종이 있던 범종각의 모습이다. 사원에서는 보통 약사전이라는 불전 안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지만, 약사전 대신 대의왕전 현판을 걸고 약사불을 모신 재활용한 전각이다.

 

Bonsonsa 약사

 

설법전으로 활용하고 있는 淸風樓의 모습. 원래 이 자리는 천왕문, 해탈문이 있던 소설루가 있던 자리였다. 때에 불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1985년에 준공했다.

 

봉선사 설법전 대법당이 있는 안쪽에서 보면 설법전으로 되어 있어 원래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던 코유키 아키라의 자리였지만 시에 불타 버려, 콘크리트의 건물에 새롭게 지어, 1985년에 낙성식을 했다.

 

남양주 봉선사 대법당은 한국전쟁 당시 사라진 뒤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포 양식의 팔작 지붕에 건립해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하지 않고 대법당이라는 등 불교 대중화에 앞선 운하님의 의지가 잘 나타난 건물이다.

 

봉선사의 주불전인 대법당(대웅전). 봉선사 주불전은 정희왕후가 이 절을 크게 중창했을 때는 서울 북한에서 가장 큰 부전이었다며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이해 소실한 뒤 1970년 중건했다고 한다. 이때 보통 사용하는 대웅전이라는 이름 대신 한글에서 대법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반사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남양주 봉선사의 대법당. 큰 한글 편액 대법당에서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공헌한 운하 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벽에서는 동판에 새겨진 한글 화엄경도 볼 수 있다.

 

대법정의 산존화

 

대법당 신나카 신중은 단순한 호법신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를 구하는 강대한 무력을 가진 신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불·보살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의 신이면서도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곧 신중한 불법 수호의 기능이 진행되는 국가의 수호, 전쟁의 승리 등에 대치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특히 신중에 대한 믿음이 번성했다. 신중의 종류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화엄신중을 비롯해 법화경의 영산 회상 수호신중, 인왕호국반야경, 대반야경에 나타나는 호국선신 등 다양하다. 그 중에는 제석천이나 범천 등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신도 있고, 인왕이나 사천왕, 팔부중 등 주로 불법의 외호를 맡은 신들도 있다.

 

봉선사 대법당(대웅전) 우측에 운영할 때 손잡이륜이 있다 ‘볶은 약이나 삼킨 촛대’를 넣어 보관하는 촛대를 볼 수 있다. 법당 사방의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으로 새겼다.

 

대법정 앞에는 1975년 운하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진 불사리 1과 봉안한 5층탑이 있어 1981년에는 운하의 무도탑을 세웠다.

 

방적당 / 방적당은 승려들이 참선하는 요사채인 선방이다.

 

운하당 운마루에 설치한 운판. 구름판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전 사물 중 하나이며 구름 모양의 얇은 청동판을 구름판이라고 부른다. 이 판을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듣고 공중에 있는 고혼과 하늘을 날아가는 조류계의 모든 생애를 제도한다는 의미로 쓴다.

 

관음전의 관세음 보살

 

대법당의 오른쪽에 위치한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전면 5사이에 옆면 3사이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부전이다. 원래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신 오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지장전 전각이다. 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불리며, 지장 보살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해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 왕상을 안치하고,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들어 올리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외에도 판관 2구, 녹사 2구, 문 입구에 장군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을 갖추게 된다.

 

오무로카쿠현 판이 있는 지장전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다며 1999년 발굴조사를 거쳐 새로 세워지기 전에는 지장전 현판을 설치했다.

 

지장 전 내부 모습

 

지장 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미치메이 존자와 무독귀왕을 겨드랑이 사무라이로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은 삼신, 칠성, 유독 삼분의 어른을 모시는 공간에서 한국전쟁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전각이라고 한다.

 

삼성각 내부

 

왼쪽부터 산신, 칠성, 독성입니다.

 

칠성(칠성) 칠성은 비와 인간의 수명과 부를 바치는 하나님입니다. 별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칠성신앙은 도교에서 북두칠성을 믿음으로 시작되었지만 고려시대에 기우제를 보낼 때 칠성신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키우제로 칠성신을 모시는 관행은 고려·조선을 통해 오랫동안 이어졌다.

 

독성 독성이란 부처가 없는 세계에서 태어나 자연 변화를 보고 스스로 토리이를 깨뜨렸다 신성한 수행자를 독성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한 혼자 선정을 닦아 진리를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獨修聖라고도 불린다. 한편 독성을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야마진 야마신은 산신령이라고도 불린다. 야마진은 농경민에게 물이나 비를 내리는 강우신이나 풍산신의 성격을 띠고, 유목민에게는 대개 사냥감을 풍부하게 내리는 은혜자이면서, 맹렬함을 ​​내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는 아이를 가져오는 신이며, 그 생명을 악령들로부터 지키는 수호신이다. 산신의 신체는 호상과 신선상이며, 산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산제 또는 산신제라고 한다. 한국은 일찍부터 산신제를 보내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 습관이 전해지고 있다.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조차 상쾌합니다.

 

납골당으로 쓰여진 개건당

 

개건당 내부

 

조사 전에는 원래 개건당으로 사용되었지만, 개건당이 새로 지어졌고 기존 개건당은 조사 전에 바뀐 것이다.

 

운하 당 측면도

 

운하당 봉젠지현판

 

판사관무헌(판사관무처) 봉선사는 미무라카쿠, 지금의 지장전이 있으며 봉선사 주위는 조선왕실에서 봉향판사의 작위를 받았지만, 봉향판사의 주지가 머물렀던 주재실이 판사관무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한 것을 1998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회랑 앞에 최종태 작가가 만든 예쁜 소녀 같은 관음상이 서 있다. 가톨릭 신자가 조각한 키치죠지의 경내에 있는 조각과도 너무 비슷하다. 조각가 최종태(1932) 교수는 가톨릭교도로서 특히 원주민이 되었다 가톨릭 성상 조각의 세계를 개척한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봉젠지는 일반사찰과 달리 금강문이나 천왕문 등을 출입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시대 양반 가옥이나 재실처럼 솟는 대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뚝 솟은 다이몬 양쪽에는 이 절을 방문한 신도들과 게스트가 묵을 수 있도록 문간채가 준비되어 있다.

 

양반 가옥이나 재실의 문간나와 비슷한 회랑, 지금은 승려나 손님이 묵는 방으로서 사용되는데, 원래 광릉을 방문한 왕실의 인사를 수행한 인원이 묵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아미타블/화강석, 오채현 작가 당당한 몸과 풍부한 얼굴로 웃는 서쪽 극락정토 주관되는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이다.

 

미륵 불 / 화강석, 오채현 작가 석가 원숭이 입멸 후 56 억년 후에 중생 구제를 위해 온다는 미래 부처님 머리에는 갓 입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밝은 미소를 입가에 머물고 있다.

 

봉선사 주변 풍경

 

고층석탑이 보이는 봉황사 주변 풍경

 

새로 건축된 미륵의 전망

 

봉선사 주변 풍경

 

연못이 5층 석탑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 봉선사 전경(국립중앙박물관 자료) 한국전쟁 당시 전각이 거의 사라져 거의 최근에 복원했다. 사진은 한국전쟁에서 사라지기 전의 전각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의 본성사의 사진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볼 수 있다.

 

반응형